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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2025 가을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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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03. 연구 과정의 어려움과 극복=== 【허】 이번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겪으신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한 과정에 관한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 디지털 인문학의 기반을 닦으신 개척자로, ‘최초의 길’을 걸어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당시의 기술적 한계에도 직면하셨을 것 같고, 아까 잠깐 언급하셨듯 전통 인문학계의 회의적 시선도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주변을 설득해 나가셨는지, 그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김】 남들이 흔히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늘 쉽지 않지요. 돌이켜보면,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들을 꽤 많이 해 왔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에서는 늘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가”, “그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곤 하는데, 사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어려움 그 자체보다는, 제가 하는 일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생소하게 느끼는 상황에서도 저를 믿고 협조해 준 분들 덕분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KAIST 연구원으로 처음 들어갈 때, 저는 제출 서류 목록에도 없는 장문의 지원 사유서를 첨부했습니다. “인문학, 그것도 동양철학을 전공한 내가 왜 컴퓨터공학 연구원이 되려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85년 KAIST 시스템공학연구소 연구원 공채 경쟁률은 100:1이 넘었다고 하는데, 제가 최종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배 연구자들이 제 이야기에 호기심과 신뢰를 가지고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KAIST에서 데이터베이스와 뉴미디어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7년 동안 쌓고, 이후 민간 기업인 ‘서울시스템’으로 옮겨 ‘조선왕조실록 CD-ROM’을 만들었습니다. A4 두 장짜리 사업계획서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서울시스템 이웅근 회장님의 이해와 전폭적 지원이 있었기에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1997~1999년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고학력 실업자 구제 정책의 하나로, 공공기관이 보유한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대규모 정보화 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의 남궁석 장관께 국사편찬위원회, 민족문화추진회(현 고전번역원),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 규장각 등이 보유한 대규모 한문 고전 자료를 포함시키자고 제안했고, 장관과 관료들이 즉각 호응해 주셔서 이 일이 성사되었습니다. 이것이 2000년대의 역사정보통합시스템, 그리고 현재의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지요. IMF 여파로 서울시스템이 사업을 중단한 뒤에는, KAIST 시스템공학연구소의 후신인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인터넷 기반 과학기술 정보 유통체계 구축 연구를 이끌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틈틈이 인문학과 정보기술을 잇는 작업을 이어 갔습니다. 특히 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 실리는 한문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구조화하고, 검색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개발·보급했는데,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한문 고전 데이터 상당수가 XML 기반 데이터로 생산되어 오늘날 인공지능 친화적인 데이터로 활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KISTI 조영화 원장과 동료 연구원들은 “과학기술 정보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농담을 하면서도 제 일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200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오게 된 이후의 여러 사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었던 XML 기반 하이퍼미디어 데이터로 편찬한 일, 민간 포털과 협력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를 구축한 일, 전국 각지에 권역별 고문헌 자료센터를 설치하고 자료 공유 네트워크를 구축한 일, 그리고 인문정보학 석·박사 과정 개설까지— 이 모든 일은 당시에는 내용도 생소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사업이었음에도, 역대 원장님들과 선배 교수님들이 “미래의 방향일 것 같다”는 막연한 신뢰를 가져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일을 시도할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틀에 없던 일을 할 때 꼭 적극적인 후원이나 격려가 없어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열린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기억나는 “어려움”이라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허】 네, 잘 들었습니다. 우문에 현답을 주셨습니다. 김바로 선생님도 여기 계시지만, 저희도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검토하고 결재하거나 승인하는 입장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생각이 듭니다. 낯설고 판단하기 어렵고 처음 접하는 일을 ‘허용’하거나 ‘방임’한다는 것은 결국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이겠지요. 선생님께서 직접 강조하시진 않았지만, 그런 신뢰를 쌓으며 길을 개척해 오신 과정이 분명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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